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에 대한 일본군‘위안부’연구회 규탄 성명
[성명] 사과와 반성을 면책하는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을 규탄한다
2023년 3월 6일,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이하 해법)을 발표했다. 피해자의 고령화,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이후 문제 미해결 상태에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면서 실질적 해법”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해법의 내용은 단촐하다. 한국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재판에서 승소한 피해자 원고들에게 판결금(위자료 해당액)과 지연이자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한국 정부가 채권자인 피해자들을 앞에서 상대하고 일본 피고 기업을 뒤로 물러나게 해 보호하는 격이다. 게다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65년 한일 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으로 인한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및 유상 2억 달러와 기타 상업자금)의 수혜를 입은 16개 한국 기업들(포스코, 한국도로공사, 코레일, 한국전력, 외환은행 등)로부터 기금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이를 두고 피해자와 국민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자 과거사의 “아픔을 보듬는” 조치이며 “한일 양국의 공동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해결책으로서 “한일간 갈등과 반목을 넘어 실질적 해결을 모색하는 새로운 역사적인 기회”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자화자찬은 우스꽝스런 아전인수 또는 정신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과잉된 자화자찬을 희극으로만 받아들이고 조소해선 안 된다. ‘해법’이란 프레임은 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의 전형적인 피해자 책임론은 2023년 3.1절 대통령 기념사에서 예견되었다. 윤 대통령은 국권 상실과 식민 지배의 책임을 일본의 침략보다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것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하여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가 아니라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파트너”로 추켜세웠다. 상식적으로 ‘협력적 파트너’가 되기 위해선 먼저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선행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아베 정부 이후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과거사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만 보이지 않았던가? 윤석열 정부는 그간 일본 정부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으며 한일관계 경색 해소를 지상 목표로 삼았다. 이 결과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와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피해자들의 인권과 회복, 이를 위한 정의 실현마저 직접 짓뭉게 버렸다. 그들만의 ‘해법’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규탄했던 3·1운동과, 3·1운동을 헌법 정신으로 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마저 부정한다.
나아가 이번 해법은 일본 기업과 일본 정부의 “공동이익”을 보호하는 조치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의 이익을 위해 자국 피해자의 권리를 외면하고 피해자의 인권과 국가 이익을 양립 불가능한 것 마냥 대립시켰다. “셔틀외교”라며 일본 정부에 통사정하는 모습을 보여 놓고, 정부의 외교적 실패를 “미래지향적인” 해결 방안이자 “새로운 역사적 기회”라고 미화하는 건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2018년 10월 30일과 11월 29일 세 개의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른 일본 피고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한국 행정부가 면책해주고 있는데, 이는 헌법에 보장된 삼권분립을 침해하고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을 포기하는 일이다.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 관련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전인수식 해석과 정신승리 방식으로 해법을 제시하려 했지만, 정작 대법원 판결(다수 의견)의 핵심 내용과 이에 대한 학계의 유력한 해석을 애써 부정하였다.
2018년 10월 30일 일본제철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 11월 29일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선고되었다. 논란이 되는 10월 30일 판결에서 전원합의체의 다수의견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을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적이 없고,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은 법원에 피해 구제를 청구할 수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피해의 구제를 요구할 외교적 보호권을 갖는다. 나아가 청구권 협정에 근거한 청구권 자금은 강제동원 피해자와 무관하다. 따라서 ‘제3자 변제’에서 청구권 자금의 수혜를 입은 한국기업들이 정부 해법대로 재단에 자금을 출연할 법적 책임은 없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마땅한 법적 근거도 없이 일본 피고 기업의 채무를 변제하여 피해자들의 채권을 소멸시키려 한다.
2019년 여름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리스트) 배제와 반도체 3개 품목 수출 규제는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보복이었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2019년 1월 9일 이후 일본 피고 기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현금화)가 진행되는 것을 두고 일본 정부가 반발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적반하장으로 한국 정부에게 해법을 내놓을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정작 2019년 한국과 일본 기업의 출연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자는 문재인 정부의 제안은 아베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고, 현재 윤석열 정부의 해법에 대해서도 기시다 정부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둘 다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는 해결책이 아니었으며 피해자에 대한 사죄라는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하지 못한 것이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집행되어야 한다. 일본 정부의 종용으로 일본 피고 기업이 채무 이행을 못하겠다고 버티고 이로 인해 한일관계가 경색되는 것은 채권자인 피해자의 책임이 아니다. 한국 정부의 역할은 자국민인 피해자를 보호하고 모든 수단을 강구해 법적 책임을 저버리는 일본 기업에 채무 이행을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과 과거청산, 역사정의의 실현은 지속적으로 경주해야 할 장기적인 과제이다. 강제동원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근본적으로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해소되지 못한 역사 문제, 즉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 2018년 대법원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를 확인함과 동시에 식민지배의 책임 문제를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식민지배 책임의 추궁은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21세기 들어 국제적인 이슈로 다뤄지기 시작한 최근의 의제다. 200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UN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주의 및 이와 관련된 불관용 철폐를 위한 세계회의’는 노예제 및 식민지 시기 범죄와 식민주의, 인종주의를 국제적 문제로 제기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운동과 2018년의 대법원 판결은 최전선에서 이러한 흐름을 선구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 대열에는 일본 사회에서도 피해자들의 운동과 소송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일본의 연구자, 활동가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일본군‘위안부’연구회는 피해자를 무시한 채 한일 정부의 야합으로 이뤄진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를 비판하고, 역사부정에 맞서 피해자 중심의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해 연구자·활동가·유관단체들이 모여 결성되었다. 본 연구회는 2015년에 이어 2023년 또 다시 피해자의 권리를 부정하고 역사를 안보 논리 아래 종속시키며 한국의 사법 주권을 부정하는 윤석열 정부의 해법에 참담함과 분노를 표하는 바이다. 본 연구회는 이번 합의와 윤석열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피해자의 인권과 역사 정의를 지키기 위한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의 연대에 적극 동참하고자 한다.
2023년 3월 8일
일본군‘위안부’연구회